어른의 여름방학
7월의 마지막 주, 휴가철의 한가운데에 할머니 댁에 다녀왔습니다. 할머니 댁은 여름방학이면 언제나 향하던 곳이었어요. 성인이 되고난 이후로는 찾아가는 횟수가 아주 줄었습니다. 바쁘기도 바빴거니와, 가족들에겐 늘 잘 살고 있다고만 대답해야될 것 같은 부담감이 있잖아요.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닌데 말이죠. 그보다 그냥 같이 보내는 시간이 추억으로 남겨지는 것이 더 중요하니까, 그런 마음으로 긴 시간의 공백이 주는 낯섦을 깨고 3년 만에야 할머니 댁을 찾아갔습니다.
오랜만에 찾아간 만큼 크고 작은 변화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뱀 같이 구불구불한 길을 지나야 할 정도로 구석진 시골이었는데 엉켜있던 덤불이 깨끗이 정리된 마냥 훤해져있었어요. 마을 한쪽에는 못 보던 집들이 생겨 있었습니다. 요즘은 귀농하러 오는 인구가 늘었다고 하시던데, 아마 그래서 생긴 것일테죠. 할머니 댁 마당 앞 나무도, 담뱃잎 건조기계도 정리됐고 어릴 적 물놀이하던 개천은 물 대신 무성한 식물들로 가득했어요.
그치만 여전한 것도 있었습니다. 마을 어귀의 정자, 집 옆의 비닐하우스와 텃밭에서 자라나는 채소들, 다 자란 어른이 되었는데도 좋아하는 음식들을 잔뜩 해 두신 할머니의 마음까지. 도착하자마자 할머니가 삶아주신 옥수수를 먹으며 소파에 누워 선풍기 바람을 쐬는데, 이제는 제게 없는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게으르게 한여름을 만끽하다가 엄마와 산책을 나가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나온 것은 아주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엄마에게 이게 무슨 꽃이냐고, 어떤 나무냐고 물으면 곧바로 대답해 주셨습니다. 길을 걷는 내내 제가 물어보지 않아도 엄마는 조잘조잘 식물과 꽃에 대해 이야기하셨어요.
“연아, 이거 봐. 옛날엔 이렇게 꽃봉오리를 터뜨리면서 놀았어. 풍선 터뜨리기라고 하면서.”
엄마는 제게는 없는 엄마만의 어릴 적 기억과 함께 걷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그것이 좋아 잠자코 엄마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덤불 같이 자라난 보라색 꽃은 도라지 꽃, 봉숭아 같지만 노란 꽃이 피어난 것은 달맞이 꽃, 아직 푸른 색으로 자라나는 줄기에 커다란 잎이 달린 건 오동나무, 곧게 뻗은 대 위에 분홍색 꽃이 피어난 것은 상상화. 엄마가 아니었다면 지나치고 말았을 이름들입니다. 지나가던 어르신은 상상화를 찍고 있는 엄마와 저를 보시며 “상상화지요?”하고 곧바로 말씀하셨습니다. 자연 속에서 살면 당연하게 떠오르는 이름일까요.
“비 오면 저 커다란 잎을 우산삼아 쓰곤 했어.”
“옛날에 나이롱 끈이 없었을 땐 칡 줄기를 끈처럼 사용했었어.”
“고추 따고 남은 줄기는 불쏘시개로 썼지.”
“옥수수 따고 남은 대는 소 여물 주고 그랬어. 버리는 게 하나도 없었어, 옛날에는.”
살아가는 데 너무 많은 것들이 필요하고 또 버려지는 이 시대의 삶이 순간 겹쳐졌습니다.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 나가는 세상, 현실을 넘어 가상에까지 확장되는 세계. 그것과는 아주 다른 텃밭의 옥수수와 고추, 가지와 양배추를 보며 도시에 두고 온 그 모든 생활들이 꿈처럼 느껴졌어요. 그래, 채소는 땅에서 자라나는 것이었지. 마트에 예쁘게 포장된 것이 아니라 벌레 먹고 흙묻은 모습이었지. 덤불 속에서 올망졸망하게 자라는 참다래의 까끌한 껍질을 만지는 것은 플라스틱 곽에 스티커가 붙여진 키위를 만지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지.
자연 속에서만 알 수 있는 것들이, 경험하고 나서야만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잖아요. 보이는 것이 전부인, 의도적으로 감추거나 미처 드러나지 않는 과정들이 없는 이 심플한 세계에서 저는 모종의 편안함을 느꼈어요. 어릴 때의 기억이 가져다 주는 친근함과 나의 일상과는 너무나도 다른 낯섦 사이에서요. 할머니 집의 낮아진 천장만큼이나 변한 세상과 나의 삶에 잠시 아득해졌습니다.
도시로 돌아온 지금, 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삶에 빠르게 적응합니다. 산책은 커녕 조그만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가상의 세계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며 글을 쓰는 내가 있습니다. 꿈 같던 현실은 다시 현실이 되고, 여름방학은 지나간 꿈이 되었어요.
지금의 이 삶은 나에게 당연한 삶이므로 시골에서 살게 되어도 이내 지루함을 견디지 못할 것을 압니다. 할머니에게 당연한 삶, 엄마에게 당연한 삶, 그리고 저에게 당연한 삶은 빠르게 변화한 세상만큼이나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렇지만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과도기에 어린시절을 보낸 저의 일부에는 여름방학의 시절이 항상 남아있을 거예요. 할머니의 삶과 엄마의 기억을 거쳐 전달되었던 내가 미처 알지 못 하는 세월까지도요.
이천이십이년 팔월 이십삼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