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는 우산을 그저 접은 채로 들고 다녔는데 집에 돌아와 우산을 제자리에 두니, 그제야 비가 쏟아졌다. 나는 이것을 행운과 낭만의 귀가로 만들려고 한다. 따뜻한 저녁식사를 차려먹고, 게으름 피우지 않은 채로 금방 뒷정리를 마친 다음, 좋은 영화를 골라 단짝과 나란히 앉으면 된다.
단짝은 밴드 오아시스를 좋아한다. 그는 기타의 낭만을 아는 부모님과, 다섯 살 많은 형의 영향으로 초등학생 시절부터 탄탄한 취향 교육을 받아왔다. 오아시스도 교육 코스 중에 하나였다. 그의 형은 그에게, “네가 이 부분을 부를 때 리암이랑 목소리가 비슷하거든? 내가 기타 칠 테니까 연습해라.” 했다. 초등학생이었던 단짝은 기타 치는 형 옆에 서서 형이 뽑은 가사지를 보며 변성기도 지나지 않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는 리암의 요상한 걸음걸이를 따라 걷는다. 오아시스를 따라 아디다스를 좋아한다.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에 리암과 노엘을 자꾸 자꾸 올린다. 앨범을 모은다. 듣는다. 가사를 외워 부르고, 기타도 치면서 부른다. 노래방에서도 부르고 자신의 애인에게도 부르게 한다.
그날 고른 영화는 <슈퍼소닉> 이었다. 갤러거 형제의 어린시절부터 1996년 넵워스 공연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다. 단짝은 이 영화를 보면 우리가 듣는 오아시스 노래 각각의 비하인드를 다 알게 될 거고 지금보다 훨씬 더 열정적으로 오아시스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했다.
음악은, 말 할 것도 없다. 그들의 음악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으니까. 우리가 더 열광한 부분은 음악보다도 겔러거 형제가 하는 말들 (FXXK OFF 이라든지!)과 지나치게 쿨한 태도였다. 걸음걸이, 말투, 습관, 재능, 에티튜드 그 모든 것에서 멋, 멋, 멋! 이 쏟아졌다. ‘무언가를 받아들임에 있어 거리낌이 없고 털털하다.’ ‘이미 끝난 일이나 관계 따위에 미련을 두지 않고 시원시원하게 행동하다.’ 이것이 쿨함의 정의다. 그 둘은 그 정의대로 사는 것 같았다. 아, 정말 조금이라도 좋으니, 닮고 싶어라.
영화가 끝났을 땐 새벽이었고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이때쯤은 뭐랄까, 밤 산책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느낌이랄까. 영화를 보고 달뜬 열기를 좁은 방 안에서만 식힐 수 없었다. 시원한 빗줄기의 도움이 필요했다. 최대한 리암 느낌이 나는 커다란 셔츠를 찾아 걸치고, 장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섰다. 걸음걸이도 묘하게 이상해졌다.
어느 방향으로 산책을 진행할지 잠시 고민하다 성당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갔다. 성당 앞은 특별히 더 고요하고, 특별히 더 빛이 났다. 유리 박스 안에 촛불들이 일렁거렸다. 유리에 맺힌 빗방울 덕에 촛불의 움직임이 한층 더 감격스러웠다.
닫힌 성당 안에는 들어가지 못하지만, 밖에는 언제든지 인사를 드릴 수 있는 성모상이 있다. 나는 성당이 어색한 단짝을 성모상 앞으로 끌었다.
“자 여기서 이렇게 손 모으고 인사한 다음에”
“손 모으고, 응”
“기도해”
기도의 내용은 전형적이다. 부처님 오신 날에 길상사에 갔을 때에도, 신년 카운트를 할 때도, 크리스마스에도, 생일 초를 불 때도, 기도의 내용은 뻔하다. 이런 건 진부할수록 진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강하게 해주세요.’
‘내 사람이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오래오래 잘 살게 해주세요.’
항상 해오던 기도들을 주르륵 돌린 다음에 특별히 하나를 즉흥으로 추가했다.
‘쿨하고 싶어요.’
성모상을 뒤로하고 걸음을 떼려는데, 그의 발에 툭 하고 물컹한 것이 채였다. 검은 우산을 쓰고 있어 시야가 가려졌던 터라 그 갑작스러운 물컹함은 귀신의 집만큼의 소스라침을 선사했다. 한바탕 소리를 지르고 차근히 다가가 보니, 성모상과 3m 쯤 떨어진 그 곳에, 새가 있었다.
“아, 새다.”
“나도 알아.”
“죽은 걸까?”
새는 두 발이 하늘을 향하게 누워 배로 비를 맞고 있었다. 가까이 살펴보니 간신히 숨이 붙어 있는지 파르르 떨리는 날개가 보였다. 이 새의 마지막 밤이겠구나.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새는 이미 죽음으로 평안히 입장하던 차였을 지도 모른다.
“편한 자세로 눕게 해주자. 지금 너무 불편해보여.”
쓰고 있던 우산을 접어, 우산의 끝을 새의 날개 아래에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반 바퀴, 새의 몸이 돌고 비로소 편안해 보이는 자세가 되었다. 우리는 다시 우산을 펼쳐 새를 적시던 비를 가렸다.
“노래 불러주자”
Lately, did you ever feel the pain
있잖아, 고통스러웠던 적이 있지?
In the morning rain
As it soaks you to the bone
새벽의 빗속에서 말이야, 빗물이 뼈까지 스밀 때.
Maybe I just wanna fly
Wanna live, I don't wanna die
아마 나는 그저 날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죽고 싶지 않아 살고 싶고,
Maybe I just wanna breathe
Maybe I just don’t believe
난 그냥 숨을 쉬고 싶어. 아마 난 믿음이 부족했는지도 몰라.
Maybe you’re the same as me
We see things they’ll never see
너도 나와 같겠지. 우리는 그들이 절대로 못 보는 걸 알고 있으니까.
You and I are gonna live forever
너와 나는 영원히 살아갈 거야
노래는 오아시스의 Live Forever 이었다.
“잘했다. 이제 가자”
성모상 앞에, 일렁이는 촛불과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죽음을 기다리는 새를 뒤로 한 채 걸었다. 걸음걸이는 다시 얌전해져있었다. 걷는 동안 새의 젖은 날개를 생각했다. 새는 죽음으로써 끝난 것이니, 미련 두지 말고 시원하게 FXXK OFF해야 한다면, 그래서 잊는다면, 그게 정말 멋있는 걸까.
아마도 그 새는 그저 날고 싶었을 거다. 아마 숨을 쉬고 싶었을 거다. 그리고 그 새와 나는 아마도, 다르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성당 앞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새를, 더 이상 생각하지 않게 되는 건 하나도 멋지지 않다.
우리는 성모상 앞에서도, 부처상 앞에서도, 길가다 만난 개구리상 앞에서도 잠깐 멈춰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기도한다. 나의 안녕과 사랑하는 사람의 안녕을 생각한다. 그리고 살기를, 잘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영원히 살고 싶다는 노래를 부를 만큼 우리는 질척인다. 삶에 질척거리는 태도가 쿨하지 못하다고 누가 말 할 수 있을까? 너도, 나도, 내가 동경하는 쿨한 그들도. are gonna Live For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