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를 잘 잡는 남자
당연하게 카카오 택시를 켜고 목적지를 입력하려는데, 어라 이게 왜 안 되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알게 된 카카오의 소식. 큰일이군. 버스도 없는 이 시간에 집에는 어떻게 간담.
어떻게 가긴 뭘. 길가에서 빈 차 잡으면 되지. 원래는 다 그렇게 했다. 골목에서부터 큰길 쪽으로 쭉 걸어 나오면 택시가 많이 다녀. 저 멀리서 다가오는 빈 차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면 되는 거야. 한 뼘 앞에 서서 손을 흔든 사람이 가로채갈 수 있으니 주위를 잘 살펴보면서.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곰탕도 꼭 나주곰탕만 먹고, 다른 집 곰탕을 사 오면 할머니를 혼냈잖아. 할머니 갈현동 2층집에 살 적엔 밤마다 술 마시고 소리 질러서, 할머니가 장독대에 숨게 만들었고. 어딘가에서 돈을 왕창 빌려놓고 그걸 꼭꼭 숨기다 들켜서, 너무 젊었던 엄마 아빠한테 안겨준 짐이 얼마야.
그런 거 다 몰랐을 땐 할아버지가 너무 좋았어. 가난하던 그 시절에 호롱불 하나 켜고 공부해서 서울대 나오셨다는 얘기도, 엄마 아빠 둘 다 바빠서 매일 준비물 못 챙겨가는 초등학생일 때, 할아버지가 영어 숙제 봐주셨거든. 할아버지 방에선 매번 우유 맛 캔디가 나왔고, 전기장판은 빨갛게 불이 들어와 있었어. 항상 두꺼운 솜이불 위에 커다란 베개를 하나 두셨는데, 그 베개는 일종의 구역이었어. 베개가 누르고 있던 부분을 들추면 다른 곳보다 훨씬 더 뜨끈하게 데워져 있었다. 거긴 내 얼린 손과 발을 녹이는 자리였지. 나는 그래서 할아버지가 좋았어. 중학교 수업시간에, 할아버지가 예고도 없이 우리 교실 찾아와서 용돈 쥐여주고 갔을 때. 사실 모른 척하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그래도 할아버지가 좋았어. 겨울마다, 시린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집에 돌아오면 바로 할아버지 방으로 향했고, 그때마다 할아버지는 커다란 베개를 들쳐 뜨끈한 이불에 내 손과 발을 넣어줬으니까.
우리 식구는 대가족이잖아. 아빠, 엄마, 할머니, 할아버지, 나, 동생, 그리고 막내 고모까지. 일곱 식구가 한집에 살았다니까. 작은 승용차에 7명이 다 탔다. 엄마 무릎 위에 내가, 고모 무릎 위에 동생이 앉으면 가능했어. 그렇게 테트리스 하듯 차를 타고 어딘가에 가면, 도착해선 꼭 차에서 내려야 했지. 7명이 내리는 걸 보고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내가 바란 건 단출함. 그뿐이었다. 단란한 우리 식구. 한 번이라도 그렇게 뱉어보고 싶었어.
노처녀라고 할머니가 걱정하던 우리 고모, 어느 날 반짝 예뻐지더니 결혼을 하고 집을 나갔지. 기침을 잘못하다가 입원한 우리 할아버지. 이미 고령이셨기에, 병원에서 살다 돌아가셨고. 이제는 나도, 동생도 대학 근처에 작은 자취방을 얻었어. 엄마 아빠는 아직도 아주 바빠서 낮엔 집을 비우고. 할머니 혼자 큰 집에 홀로 있는 시간이 너무 많아. 내가 집에 있는 날엔 할머니랑 나, 둘 뿐이야. 단출하다는 건, 슬픈 거구나.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보고 싶을까?
고등학교 졸업할 때쯤 이런 거 저런 거 다 듣게 되고, 아빠가 왜 장례식장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지도 알게 됐는데. 이미 곁에 없는 할아버지를 뒤늦게 미워할 수도 없고. 내가 태어나기 전의 세월을 생각하면 아득해. 그런데 그 아득한 세월이 시작되기 전에 말이야, 가장 처음에,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왜 좋았어?
그게 말이지. 택시를 잘 잡으셨거든, 네 할아버지가.
뭐? 택시?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 젊었을 적에. 서울에서 택시 잡기가 무지하게 어려웠거든. 그런데 네 할아버지는 턱턱 잡는 거야. 요령껏 센스 있게, 아주 남자답게.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지. 그래서 호감이 간 거지. 그때까지 귀하게 자라서 콧대 높던 할머니가, 서울 한복판에서 택시를 잘 잡는 남자에게 반한 거야.
카카오 택시는 여전히 먹통이고 길에 한참을 서 있는데 이거 참, 빈 차가 하나도 없네. 겨우 발견한 빈 차 한 대가 가까이 오든가 싶더니 내 앞에서 튀어나온 여자를 태워 갔어. 빨리 집으로 가야 하는데. 이렇게 차가운 길에서, 발 동동 구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신묘하게도 택시를 잘 잡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 뭐, 멋있긴 하겠다.
젊은 두 사람 서로 어색할 때, 다방에서 나와 식당으로 가려고 할 때. 남자는 순발력 있게 택시를 세우고, 여자의 차가운 손을 딱 잡아, 에스코트하던 순간. 본 적 없는 그 장면을 추억하는 젊은 손녀가 있어. 어떤 장면은 60년을 거쳐 살아남기도, 아니 부활하기도 하나 봐.
우리 할아버지는, 택시를 잘 잡는 멋진 남자였던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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