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사는 사람
요전엔 살바도르 달리의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초현실주의의 거장 달리말이에요. 그 흘러내리는 시계, 기억나지요? 초현실주의는 무의식을 그려낸 것이라고 하잖아요. 그래서 꿈과 같은 이미지가 많은 거예요. 깨고 나면 말도 안 되지만 꿈속에선 당연하게 일어나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들을 현실로 가져온 거죠.
요즘은 꿈을 많이 꿉니다. 남들은 하늘을 날고 끝없는 벼랑으로 떨어지고 슈퍼파워를 가지는 꿈을 꾼다는데 어쩐지 나는 꿈에서도 현실을 삽니다. 가장 끔찍한 현실. 어떤 의미에서 악몽이라고나 할까요. 현실에서 내가 걱정하는 일들이 꿈속에서 일어납니다. 예를 들자면 회사에 엄청나게 지각을 한다든가, 중요한 약속에 늦어서 죄책감에 시달리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미안하단 문자를 보낸다든가. 좋아하는 애가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본다든가 하는, 그런 악몽들.
나는 차라리 괴물에게 쫓기거나 악당을 피해 좁은 곳에 겨우 숨거나 하는 스펙터클한 악몽을 꿨으면 좋겠어요. 꿈속에서조차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다니, 조금 불쌍하지 않나요. 정말로 일어날 만한 일이잖아요. 그런 꿈을 꾸고 막 깨어나면 더 끔찍합니다. 현실과의 얄팍한 경계에 진짜인 줄 착각했다가 깨고 나서야 꿈인 걸 알아요.
무의식의 영역이라는 꿈속마저도 현실에 머무는 걸 보면 나는 지독하게 현실적인 사람일까요.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 상상력마저 결여된 사람인걸까요. 상상 속에선 무엇이든 이룰 수 있다는데, 나는 현실 아니면 이야기에 기대야만 겨우 땅에서 발을 뗍니다.
소설을 유독 좋아하는 이유도 그거예요. 이야기를 재료삼아 단칸방 같은 내 상상의 세계를 조금씩 넓혀가는 거죠. 나는 그 안에서나마 모험을 합니다. 그 인물이 되어서 울고 화를 내고 용기를 내고 비애섞인 행복을 맛봅니다. 그것은 참 간편하죠. 마땅히 맞닥뜨려야 할 괴로움은 몰래 지켜보는 것으로 흘려보내고 그 뒤에 찾아올 설렘과 그리움과 애정은 마음껏 느낄 수 있으니까요. 취사선택할 수 있는 감정이라니. 안전하고 달아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된다는 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입니다. 혹자는 그게 오히려 더 쉽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제겐 아닌걸요. 소설 대신 에세이만 쓰는 이유도 그래서예요. 꾸며내는 것은 제게 영 쉽지 않거든요. 그러니 내가 아닌 누군가를 만들어내고 그들의 이야기로 수많은 사람을 웃고 울리는 사람들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걸까요.
소설을 쓰는 나의 친구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야기는 늘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 현실보다 더 낫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이야기잖아. 나를 숨길 수 있는 방패이자 과거의 어떤 순간을 해피엔딩으로 바꿀 수 있는 효험 좋은 약이자 현실의 탈출구인 셈이지.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야말로 꿈에서 사는 사람일 거야.
그 애는 그렇게 솔직하게 쓸 수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애의 세상이 부럽기만 했는데 말이죠. 그 애 손 끝에선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니까요. 전지전능한 신과 같잖아요.
나는 이따금 그 애가 보여주는 짤막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상상해 봅니다. 나의 현실에서 일어났던 괴롭고 슬픈 이야기들을 모조리 행복한 결말로 바꾸는 상상을요. 그 상상 속에서 나는 더없이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선택에 후회할 일도, 지질했던 어릴 적의 마음도 모조리 지워냅니다. 그곳은 깨끗하고 곧고 아름다운 사람들만이 존재해요. 그야말로 꿈과 같은 세상이지요.
그렇게 현실을 조금씩 비틀다 보면 언젠가 내가 아닌 사람들의 이야기도 쓸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애가 나를 보듯 솔직함이 두려움을 이기던 이 시기의 나를 그리워할 날이 오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을 하며 잠에 들지 않은 채로 꿈을 꿉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 역시 그 꿈들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이천이십이년 시월 삼일
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