띄어쓰기를 허락하지 않는 붉은 밑줄의 세계
나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들이 다른 누군가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안도를 느낀다.
내가 그 선한 양의 무리 속에서 늑대가 아니라는 사실에 기쁨을 느낀다.
그들과 함께하면 평화롭고, 그들과 함께하면 자유롭다. 그것은 사랑이 가져다줄 수도, 빼앗아갈 수도 없는 소중한 것이다.
나는 창문과 대문을 서성이며 그들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마치 해시계처럼 무한한 인내심으로 항상 너그럽게 그들을 이해한다. 사랑이 결코 이해 못하는 것을.
언제나 관대하게 용서한다. 사랑이 결코 용서 못하는 것을. (후략)
감사,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멋진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을 마음 깊이 친애하며 응원하고 때로 응원받는다. 그들이 내 곁에 있고 내가 그들의 곁에 머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와 감사를 느낀다. 머릿속으로 그들의 이름과 얼굴을 하나씩 떠올린다. 한 명 한 명, 모두가 나에겐 너무 크고 깊고 짙다. 함께한 시간이 진득하고 그 속엔 행복과 후회와 연민과 눈물과 웃음이 빼곡히 들어차 있다. 하지만 그 친구들의 리스트는 꽤 길게 이어진다. 각각의 거대함이 무색할 정도로 여럿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친구 사이를 아름답게 만든다. 깊고 진한 것과는 무관하게 나와 내 친구 사이에는 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사랑이 허락하지 않는 띄어쓰기를 우정은 아무렇지 않게 허락하고 그 덕에 빨간 밑줄로 피를 흘리는 일도 잘 일어나지 않는다.
복잡하게 얽혀 서로에게 무심코 상처를 내는 사이는 없다. 대체로 무해하고 든든하며 살짝 데운 우유처럼 담백하다. 그 때문에 친구 사이의 질투나 시기심, 서운함, 배신, 실망을 이야기하는 건 정직하지 않다는 기분이 든다. 그런 이야기는 몇 해 전 나에게 맡겼으면 술술 잘 써 내려갔을 텐데. 또는 몇 해가 지난 후 나에게 친구에 대해 다시 물으면 더 풍부한 우정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지금에 충실하자면, 난 우정의 안전한 영역에 들어와 있다.
그건 성인이 된 이후로 줄곧 애인이 있었기 때문일까? 사랑의 자리와 우정의 자리를 구분해서 내어주어서, 애인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큰 기대를 품지 않아도 되었고 따라서 기대의 그림자로 따라오는 실망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일까? 그게 아니면, 꽤 긴 시간 동안 주기적으로 상담을 받아서, 상담 선생님으로부터 완벽한 이해의 감각을 경험했고 그것을 대체할 관계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잘 모르겠다.
사랑은 좋은 만큼 비례한 안 좋음이 있는데, 우정은 좋기만 해도 괜찮다는 기분이 든다. 사실은 내가 치러야 할 안 좋음의 비용을 무한정 미루고 있는 걸 수도 있다. 사랑을 시작할 때 행복의 대가로 달게 감수하는 슬픔을, 친구 사이에선 생각하지 않는다. 친구 사이가 내포하는 ‘적당한 거리’는 관계의 달콤함만 취하고 쓴 부분은 버려도 되게끔 해주는 특권 같다.
어쩌면 나는 비스와바 쉼보르스키의 시를 방패 삼아 우정의 안전한 영역에 대한 욕심을 부리는 걸지도 모른다. 나에게 다른 누군가가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해주기를 바라며, 적당한 거리 때문에 서운함을 느끼지 말아 달라고. 그리고 같이 이 우정의 푹신한 부분에 머무르자고.
나는 저 시가 굉장히 마음에 들어서, 인스타그램 비공개 계정에 올린 적이 있다. 친구들한테 바치는 헌시라고 덧붙였다. 친한 친구들끼리만 팔로우하는 작은 계정이었다. 한 친구가 댓글을 달았다.
‘나는 사랑이니까 용서하지 마.’
그런 적이 또 한 번 있다. 사랑이 나에게 커다란 슬픔을 안겼을 때, 가까운 곳에서 며칠을 밤낮으로 위로해준 친구가 한 말이다.
“나는 네가 약해져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 아파. 그런데 동시에 내가 너에게 도움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심 좋고 기쁘다. 너를 걱정하고 위해주는 게, 사실 너에게 최대한 가까운 존재가 되고 싶었던 내 이기적인 마음이었을지도 몰라.”
빨간 밑줄이 눈에 거슬려서 야금야금 여기로, 빈칸의 세계로 기어들어 왔다. 나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그들의 모든 것을 궁금해하지 않으며. 띄어쓰기를 허락하지 않는 빨간 밑줄의 세계에는 내가 보지 않는 우정의 다른 쪽이 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는 지금, 이곳을 나가 마구 붙여 쓰는 세계로 점프해보면 어떨지 궁금해지고, 그래서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내가 친구들에 대해 벌려뒀던 틈은, 이미 오래전부터 좁혀질 준비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